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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존재하는 무(無)에 대하여
    뇌 먹이주기/성인이 되어 다시 배우는 수학 2022. 9. 26. 01:22


    픽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이승에서 기억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은 망자는 망자의 세계에서도 소멸하게 됩니다. 망자의 세계에 살고 있는 헥토르는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소멸할 위기에 처하죠.

    (*스포주의)


    이승에서 헥토르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치매에 걸린 딸 코코인데, 심한 치매로 말을 거의 하지 못하고 가족들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극적으로 저승 세계에서 고조 할아버지와 만난 현손(손자의 손자)이 이승으로 돌아가 증조 할머니가 아버지를 기억하게 만드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코코가 아버지를 기억하게 되면서, 헥토르는 망자의 세계에서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됩니다. 

    픽사 스튜디오의 <코코> 중에서


    헥토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코코의 곁에는 더 이상 없는 사람이지만, 코코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코코에게 아버지는 존재하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이제는 실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한편, 헥토르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다면 어땠을까요? 그가 존재했던 사람이라는 것도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지만, 그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코코'에서 우리는 두 가지 '없음'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있지만 없는 상태입니다. 즉,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상태이죠. 코코의 아버지가 부재(不在)한다고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음(在)'의 개념을 수반해야 합니다.

    "유니콘은 없어"


    누군가가 유니콘 따윈 없다고 말했다 칩시다. 유니콘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고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니콘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유니콘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유니콘을 그려보라고 하면 그려낼 수도 있습니다. 즉, 유니콘은 우리의 인식 상에 '있는' 동물입니다. 우리의 상상의 산물 역시 인식할 수 있다면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실재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먼저 존재해야 하는 것이죠. 

    유니콘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존재'한다

     

    두 번째 없음은 '비존재(非存在)' 입니다. 비존재하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을 때 영원히 사라지는 망자의 영혼과 같습니다. 비존재하는 사물은 분별해 낼 수 없으며,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유무 파악은 커녕 그것에 대해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비존재는 우리의 인식 영역을 벗어납니다. 이 두번째 '없음'을 철학에서는 '절대적 무'(無)'[각주:1] 라고 부릅니다.   

    리는 우리 스스로가 비존재하는 상태 역시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분별해낸 모든 것은 우리의 인식 능력을 전제로 합니다. 즉 우리가 존재한다는 가정 없이는 어떠한 사물의 존재 여부도 파악해낼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인식함을 전제로 하는 닫힌 계에서 우리 스스로의 '비존재' 상태란 없습니다.

    즉, 무(두번째)는 무(첫번째) 이다 

     


    우리가 분별하고 기억하는 모든 것은 현상계의 실재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분별해 낸 순간 대상은 존재하게 되고, 그것이 있을 수 있다면 동시에 없을 수 있다가 가능해 집니다. 일상에서 공기는 색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만져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인류는 꽤 오랫동안 공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 공간은 그냥 비어있다(
    空)고 인식했을 것입니다. 여러 방면의 관찰과 실험으로 마침내 공기를 분별해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공간에는 공기가 가득 차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공기가 없다는 개념도 함께 상상할 수 있게 되었을 겁니다. 그 전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개념을 바탕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공기가 없다'는 것은 존재하는 무(無)인 셈입니다. 

    기원전 5세기에 이미 노자는 도덕경 제2장에 이미 이런 내용을 남겼습니다.[각주:2]

    故有無相生,(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함께 태어나고)
    難易相成,(어려움과 쉬움은 함께 있어야 이루어지며)
    長短相形,(길고 짧음은 서로가 있어야 형상을 이루고)
    高下相傾,(높고 낮음은 서로 때문에 분별되고)
    音聲相和,(음성의 높고 낮음은 상대가 있어야 조화가 되며)
    前後相隨。(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


    2500년 전의 노자도 존재하는 무()의 의미를 전달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제 나름대로 추론해 봅니다. 

    어려움이 있다면, 없는 상태 (쉬움)가 함께 있어야 하며,
    길다는 개념이 있다면, 없는 상태 (짧음)가 있어야 하고,
    높다는 개념이 있다면, 없는 상태 (낮다)가 있고,
    앞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없는 상태 (뒤)가 있다


    수학을 공부한다면서 갑자기 뭔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은 제가 수의 체계를 이해하는데 아주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동전의 앞면이 있으면 뒷면도 있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있음과 없음의 대칭을 이룬다는 것.
    없다는 것 그 자체도 있다는 것(존재하는 상태)으로 인정하는 것.

    인류가 발명한 수의 체계는 바로 이러한 우리 인식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좀 더 탐구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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